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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장기집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에 항거하여 시위를 일으켰다."
항쟁의 의의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장기집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에 항거하여 시위를 일으켰다.
3월 15일 1차 의거에서 사망 7명(김삼웅, 김용실, 김영준, 김영호, 김효덕, 오성원, 전의규), 중상 1명(강융기 : 병원에서 투병 중 4월 10일 사망), 실종 1명(김주열) 그 외 부상자와 구속자들이 250여 명에 이르렀다.
4월 11일 그동안 행방불명 되었던 김주열 군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시체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격분한 시민들이 다시 2차 의거를 일으켜 싸웠다.
이날 밤 다시 총찰의 발포로 김영길 군이 사망하고 수십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4월 12일 마산 시내 소재 8개 남녀 고등학생의 시위와 13일 해인대학교(현, 경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러한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의로운 투쟁은 전 국민의 분노와 함께 4·19혁명으로 이어져 4월 26일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시 마산에서 2명(김종술, 김평도)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자유 · 민주 · 정의가 기본 정신인 3 · 15마산의거는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유혈민주화운동으로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또한 민족 평화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 도도한 물결은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진형행으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