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3·15의거 > 발생배경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장기집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에 항거하여 시위를 일으켰다."
발생배경
1948년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에 피선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을 지낸 후,
1952년 자유당을 창당하면서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54년에는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을 고쳐 실질적인 종신 대통령의 길을 마련하기 위한 개헌안을 내놓았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자, 사사오입 논리를 적용하여 부결을 번복하고 통과시킨다.
1956년 3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장기 독재에 대한 국민의 비판통로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1958년 8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야당과 언론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신국가보안법은 59년 1월 15일 자로 발효되었다.
이와같은 강압 정치와 집권 연장에의 야욕은 이후 한층 구체화, 조직화되어 3 · 15 부정선거를 유발하게 된다.
자유당은 내무부장관 최인규의 지휘 아래 1년여에 걸쳐 치밀하게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전국 경찰의 주요 간부는 모두 맹목적 충성 인물로 교체되었고, 야당의원들에 대해 집요한 분열 공작이 펼쳐졌으며,
정치깡패 등을 동원해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일반 공무원은 물론 교육 공무원들까지 부정선거 운동에 투입되어,
자유당에 투표할 것을 설득 권유하는 담임교사의 가정방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 치료 차 미국으로 건너가자,
1960년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있는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
조병옥 후보는 미국 육국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선거가 한달 남은 2월 15일 심장마비를 일으켜 서거하였다.
이에 대통령은 이승만 단일 후보로 당선이 확실해졌고,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 계획은 더욱 구체화 된다.
3 · 15 이전의 마산 정국에 가장 큰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은 허윤수였다.
58년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입후보하여 당선한 허윤수 의원은 시민들에게 비교적 신망을 얻어온 보수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는 자유당 이용범에게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자유당 공천 및 당선 보장과 동양주정 경영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1960년 1월 5일 탈당을 선언한다.
이후 1월 11일 자유당에 정식 입당하였으며, 3월 4일에는 동양주정을 인수하였다가
경쟁업체인 무학주정으로 매각하게 된다.
동양주정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 대표적인 부패 정치인이자 기업인이었던
이용범의 배후조종으로 부산지검 마산지청장 서득룡과 마산세무서장 서복태까지 개입된 정관경 유착의 표본이었다.
마산 시민들은 자신들이 찍어준 표를 팔아 동양주정을 삼켰다고 격분하였으며,
정치신의를 저버린 허윤수 개인에 대한 증오와 공작정치를 일삼는 자유당에 대한 반감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1960년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인당 80$에 지나지 않았으며
농경산업이 70%이상 차지해 나라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빈사상태에 빠진 한국 경제는 서민들의 생존 유지마저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수입된 미국의 잉여농산물은 곡물 가격을 터무니없이 하락시켜 농촌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대부분의 농가에서 보리고개를 넘기지 못해 소나무 껍질, 칡뿌리, 산나물 등으로 허기를 채워나가야만 했다.
이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도시로 빠져 나오지만,
공장의 일자리도 이농민들을 수용하기에는 현저히 부족하여 실업률은 23.4%에 달하게 된다.
또한 소수 특권층 중심의 매판기업이 경제권을 독점함으로써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켰다.
8 · 15 광복을 주체적으로 쟁취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외세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에 한국전쟁을 겪으며 권력과 유착한 소수 특권층들은 산업자본가로 전환하였고
원조체제를 적극 활용하여 신흥 재벌로 성장한다.
재벌과 집권당의 정경(政經)유착은 필연이었으며, 심지어 이들 중 22%는 현직정치인이었다.
수많은 특혜에 대한 대가로 재벌들은 정치자금에 깊이 관여될 수 밖에 없었고,
자유당은 1백 50억환이 넘는 선거자금을 조성하였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민들과는 대조적으로 거의 모든 경제권과 부를 독점할 수 있었던 소수의 재벌들
또한 그들과 뿌리깊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이어온 집권당의 부정부패는 1950년대 굴절된 사회상의 단면이었다.